오늘도 어제와 같다고는 말했지만 그 목적지는 평상시와 달랐다. 이른 아침도 아니었고, 회사에 출근하는 길도 아니었다.
지금이 몇 시야? 손목시계를 쳐다본다. 늦은 오후지만 지금부터라도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그녀에게로 달려간다.
너무나 보고 싶은 그녀. 그 사람. 나만의 사람.
인애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버스 안에는 다행스럽게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인애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버스 안을 굉장히 싫어했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겪는 만원버스의 고통을 다정을 만나러 가면서까지 겪고 싶지는 않았다.
다정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기쁘고 행복하지만, 이렇게 한산한 버스 안에서는 그 기분을 마음껏 만끽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애는 다정과 같은 회사를 다닌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함께 동거를 했다. 두 사람이 같이 동거를 하면서 집세나 생활비를 반반씩 부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좋았고, 특히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는 편이라 아주 사소한 몇몇 의견차이를 제외하면 동거를 하면서 하루하루가 즐겁고 편안했다.
각자 집안일을 분담하여 맡은 일은 착실히 처리했고, 한 사람이 아프기라도 하면 다른 한 명이 할 수 있는 만큼 아픈 쪽을 배려해서 집안일을 돕고는 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심각한 다툼 같은 것은 동거를 하던 2년여 동안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사정상 두 사람은 현재 떨어져 지낸다. 그것은 다정이 회사를 그만두면서부터였고,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다정은 인애와 떨어져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집을 떠났다. 다정도 그것에 대해서 몹시 애석해하고 망설이는 듯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애는 다정을 자주 찾아갔다. 다정은 더욱 정신없이 바빠진 탓인지 몰라도, 시간이 잘 나지 않았다. 자주 지쳐보이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그래서 인애는 툴툴거리면서도 기꺼이 자신이 먼저 다정을 만나러 갔다.
툴툴거린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애는 다정을 만나는 것 자체에 큰 기쁨을 느꼈으므로 자신이 먼저 찾아가는 것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시무룩하던 기분도 금방 살아났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사귀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회사를 다니고, 퇴근을 하고, 함께 동거를 하던 그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인애에게 다정은 빛이었고 행복이었고 세상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지금의 떨어져 지내는 상황에도 만족했다.
다정은 잠이 많은 편이었다. 평일에 회사 출근을 할때는, 거의 매번 인애가 다정을 잠에서 깨워줘야 했다. 인애가 아니었더라면, 다정은 진작에 회사에 지각쟁이로 상사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혔을 것이다.
둘은 각자 팀이 달라서 업무를 보는 중에는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메신저를 통해 틈틈히 잡담을 나누기도 했고, 점심은 뭘 먹을까, 집에 가서 저녁밥은 뭘 만들어 먹을까 하는 소소한 대화를 즐겼다.
퇴근을 할 때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 주곤 했다. 인애가 기다릴 때도 있었고, 다정이 인애를 기다려 줄 때도 있었다. 기다림에 짜증이 나거나 지칠 법도 하지만 두 사람은 사무실 밖에서 얼굴을 다시 마주하면 지쳤던 마음은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서로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러면 하루의 피곤이 금세 덜어졌다.
버스의 창밖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인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은 같은 회사도 아니지만, 같이 다닐 때의 일들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참 재미있었다. 웃긴 일들도 많았고, 황당한 일들도 많았고, 아쉬운 일들도 많았고.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이 함께한 기억이기에 다 좋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다.
쭈욱 계속 함께 회사에 다닐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다정에게도 다정만의 이유가 있으니까 당연히 이해해줘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애는 마음으로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눌러 참았다.
괜찮아. 사랑하니까.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인애는 다정을, 다정은 인애를 사랑하니까.
목적지까지 도착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애는 중간에 몰려오는 졸음에 못이겨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잠시 그렇게 잠들었다.
늦은 오후에 버스에 탄 탓에, 인애가 살풋 눈을 떴을 때는 버스의 창밖이 이미 어두운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인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로등의 불빛들이 주변을 밝히고, 그 가로등 사이로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나무들이 인애의 시선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다정에게로 가는 길은 여전히 낯설다. 아직 그렇게 많이 다녀본 길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버스 안으로는 인애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버스는 텅 비었고, 인애만이 수많은 좌석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창밖에 어둡다 보니, 혹시 자신이 내려야 할 목적지를 지나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창밖을 두리번 거리는데 한산한 도로를 쭉 달리던 버스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 딱 맞게 다 왔구나. 인애는 다정을 만나러 올 때면 내리던 버스 정류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버스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다정이 알까? 혼자가 된 집에서 잠을 자려고 누울 때마다 얼마나 사무치게 다정의 품이 그리운지. 매일 밤 온전히 혼자만이 독차지할 수 있었던 그 따뜻한 온기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했던지. 얼마나 다시 끌어안고 싶은 것인지.
아마 인애만이 아니라 다정 역시 그럴 것이었다.
하차 벨을 누르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버스는 완전히 정차했다. 전자음이 울리고 뒷문이 벌컥 열렸다.
인애에게는 아직도 낯선 정류장이다.
다정과 늘 함께 버스를 타던 정류장이 아니고, 늘 아침마다 함께 버스를 타던 정류장이 아니다.
낯선 정류장.
이 낯선 정류장에서 언제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사람이 있다.
이 낯선 정류장은 다정이 있으므로 낯설지 않다고 생각된다.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어둑한 버스 정류장에서는 언제나처럼 다정이 인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애는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다정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와락 달려들었다. 다정도 미소로 인애를 끌어안았다. 둘 다 반가움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베시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인애는 다정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라 몹시 걱정이 되면서도, 이렇게 오늘도 만날 수 있어서 하늘에 감사했다. 매일 보던 얼굴을 가끔씩만 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인애에게는 서글픈 일이었고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다정과 만나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가슴속이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된 뒤로, 다정의 얼굴이 조금씩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오늘은 더했다.
인애는 다정에게 피곤하냐고 매번 물어보았지만 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매일같은 일에 치여 다정이 몹시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너무 힘들어서 지쳐있던 다정을 인애가 억지로 찾아와 끌어내고, 그렇게 다정을 더욱 지치게만 만들고, 힘겹에 미소짓게 만들면서 괴롭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항상 나한테 웃어줬잖아. 내가 버스에서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날 안아줬잖아. 웃어줬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그래?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거야? 이유라도 알려줘야 내가 알잖아.
서러웠다. 내가 널 이렇게 찾아오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먼 길을 널 찾아 달려오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서 날 슬프게 만들어?
내가 너를 너무 자주 찾아와서 그래? 그러면 좀 더 줄이도록 해볼게. 매일매일 찾아오던 거, 일주일에 네 번으로 줄인것도 나는 아쉬운데. 여기서 더 줄어야 해? 그럼 일주일에 세 번은 안돼? 그것도 많으면, 일주일에 두 번.
두 번도 안돼? 그럼... 그럼 일주일에 한 번. 나는 그걸로도 괜찮아. 나는 너만 만날 수 있으면 그걸로 좋아, 다정아.
내가 왜 너랑 헤어져?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인애는 참으려고 했지만 애를 써보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넘쳐흘렀다. 손으로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방울들을 닦아낼 새도 없이 그렇게 줄줄 눈물이 흐르는 시야로 흐릿한 다정이 보였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분명히 만날 수 있을거야. ]
내 인생에,
너보다 더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사람은 없어!!
절규와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인애는 다정의 손목을 붙잡았다. 인애의 두 눈이 커졌다.
인애와 마찬가지로, 다정도 울고 있었다. 다정이 서글픈 목소리로 애원하듯이 인애에게 말했다.
[제발...]
사랑하는 그녀의 눈물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깊게 내리꽂혔다.
인애는 다정과의 이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이 품어왔고 지켜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삶과 희망, 기쁨, 행복, 다정으로 인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들... 그것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인애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에서 가만히 눈을 떴다. 침대는 인애가 혼자 누워서 잠자기에는 지나치게 넉넉한 크기였다. 여유로운 크기의 침대 옆 공간에는 필시 누군가가 누워 있어야만 한다. 그 사람은 오로지 다정 뿐이라는 것을 인애는 속으로 되뇌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으로 달빛이 비쳐들었다. 인애는 그조차도 눈이 부셨다. 하지만 일어나서 커튼을 치기에는 기력이 부족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이대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침대 속으로 가라앉듯이 자신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애는 생각조차 피곤한 듯 이내 눈을 감았다.
그 때, 그 날.
인애는 전날 회사에서 다 처리하지 못한 일을 아침일찍 가서 마무리 해 놓을 생각으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다정을 깨웠지만, 항상 일어나던 시간보다 더 이르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던 다정은 시간에 맞추어 갈 테니 먼저 출근하라고 인애를 보냈다.
일어나라고 보채는 인애의 뺨에 다정은 살풋 뽀뽀하며 사랑해~ 하며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인애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정이 더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알람을 몇개씩이나 맞춰도 못 일어나면서, 정말 제 시간에 회사에 올 수 있어? 그렇게 묻는 인애에게 다정은 잠꼬대처럼 당연하지 하며 반쯤 잠에 취해서 대답했다.
그래서 인애는 늘 함께 출근하던 다정을 걱정스럽게 뒤돌아보고는, 마지못해 먼저 회사로 향했다.
회사의 출근 시간이 3분 지났다. 인애는 결국 지각이네, 하면서 다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잠이 많은 다정이니까, 알람을 듣지도 못하고 여지껏 자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는다.
이따가 다시 걸어봐야지. 몇 분이 더 지나서 인애는 다른 전화를 받게 되었다.
출근길 버스 사고.
부상자.
사망자.
사망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가 먹어버린 것처럼 갑자기 주변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는 것 같았다.
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고요?
출발은 언제나와 같은 정류장.
인애와 다정에게, 둘 모두에게 익숙한 정류장. 늘 함께 버스를 타고 회사로 출근했던 두 사람.
도착지는 낯선 정류장.
다정을 만나기 위해 인애가 찾아가는 목적지. 다정에게 가기 위해 인애가 타는 버스.
다정이 있어야 하는 곳은 인애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다정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인애가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이었다.
낯선 정류장의 어둠 속에서 다정은 인애를 기다렸다. 인애가 실수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도록 다정은 인애를 낯선 정류장에서 매일처럼 기다렸다. 자신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진 영혼이 인애를 인도하지 못하도록 다정은 매일같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인애를 기다렸다.
자신에게로 오는 인애의 마음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 들렸다.
다정은 인애가 자신을 찾아 헤매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어두운 정류장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이 정류장을 알지 못했고 찾아오지 못했다. 인애만이 그랬다. 인애만이 그랬기 때문에 기뻤다기 보다, 다정에게는 크나큰 걱정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높게 쌓여가는 슬픔이었다.
다정을 찾아오면 찾아 올 수록, 만나면 만날 수록 인애가 죽어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젠 침대에서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지치고 말라가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노라고, 보고 싶다고 한마디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매몰차게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 매일처럼 아팠다.
인애는 오늘도 다정을 만나기 위해 이 낯선 정류장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정 또한 인애를 마중하기 위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